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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타쿠계 문화의 기원 by 착선

오타쿠계 문화의 특징은 지금까지 일본의 전통문화와의 비교 위에서 논의되는 일이 많았다. 가령 비평가인 오쓰카 에이지는 1989년에 출간된 '이야기 소비론'에서 80년대에 급증한 2차창작의 존재의식을 가부키나 닌교조루리(일본의 대표적인 전통인형극)에서의 세계나 취향이라는 개념을 써서 분석하고 있다. 이 논의는 앞에서 언급한 오타쿠학 입문에도 암묵적으로 도입되고 있으며, 오카다는 그 바탕에서 오타쿠들은 작품의 메시지보다도 오히려 취향을 읽어내는 데 중점을 두며 그 감각은 에도시대의 이키(에도 시대 후기에 발달한 세련된 미적 감각)에 직결되어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오타쿠학 입문의 마지막 장에는 '오타쿠는 일본 문화의 정통 계승자이다' 라는 제목이 붙어있다. 이런 지적은 주로 오타쿠들의 소비행동에 주목해서 이루어지고 있지만, 그 내용에 대해서도 오타쿠계 문화와 전통문화의 연속성이 여러 곳에서 지적되고 있다. 그중에서도 가장 유명한 것은 아마도 현대미술가인 무라카미 다카시의 주장일 것이다. 그에 따르면 70년대에 애니메이터 가나다 요시노리가 달성한 독특한 화면 구성은 가노 산세쓰나 소가 쇼하쿠의 기상과 이어지며, 또 90년대에 원형사인 보메나 다니 아키라가 선도한 피규어 조형의 진화는 불상 조각의 역사를 반복하고 있다. 이러한 논객들의 논의를 제쳐두더라도 오타쿠계 작품과 일본적인 이미지와의 친화성은 누구나 쉽게 알아차릴 수 있다.

그렇다면 거꾸로, 오타쿠들은 왜 앞에서 말한 것처럼 일본적인것에 집착해온 것일까? 여기에서 상기해야 하는 것은 오타쿠계 문화의 기원은 애니메이션이든 특수촬영이든 SF든 컴퓨터 게임이든, 그리고 그 모든것을 뒷받침하는 잡지문화든 실은 2차대전 후 50년대부터 70년대에 걸쳐 미국에서 수입된 서브컬처였다는 사실이다. 오타쿠계 문화의 역사란 미국 문화를 어떻게 국산화하느냐 하는 환골탈태의 역사였으며, 그 과정은 고도경제성장기의 이데올로기를 매우 잘 반영하고 있기도 하다. 따라서 만약 지금 우리가 애니메이션이나 특수촬영의 화면 구성에서 일본적인 미학을 보게 된다면, 그와 동시에 바로 수십 년 전까지 이 나라에는 애니메이션이나 특수촬영이라는 것이 없었으며 그것이 일본적이 된 과정은 상당히 왜곡된 것이었다는 사실 또한 상기할 필요가 있다. 오타쿠들은 분명 에도 문화의 계승자일지도 모르지만, 그 양자는 결코 연속적이지 않다. 오타쿠와 일본 사이에는 미국이 끼어 있는 것이다. 오타쿠계 문화의 일본에 대한 집착은 전통을 바탕으로 성립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전통이 소멸한 뒤에 성립한 것이다. 바꾸어 말하면 오타쿠계 문화의 배후에는 패전이라는 심적 외상, 즉 우리가 전통적인 주체성을 결정적으로 잃어버렸다는 잔혹한 사실이 감춰져 있다. 오타쿠들의 상상력을 혐오스러운 것이라고 거부하는 사람들은 실은 무의식중에 그런 사실을 알아차리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와 같은 상황에 주의를 기울이면 오타쿠들이 의사 일본에 집착하는 이유를 또다른 각도에서 확인할 수 있다. 오타쿠라는 말이 사회적으로 알려진 것은 1989년의 일이지만, 그 존재가 하나의 집단으로 의식되어 앞에서 말한 것과 같은 의사 일본적인 상상력이 널리 지지받기 시작한 것은 70년대에서 80년대에 걸쳐서의 일이다. 그리고 그것은 일본에서는 포스트모더니즘이라 불리는 사조가 유행하기 시작한 시기와 거의 일치한다. 당시 일본에서 유행한 포스트모더니즘의 언설은 포스트모던적인 것과 일본적인 것을 의도적으로 혼동해서 논하는 데 특징이 있었다. 당시 포스트모더니스트가 즐겨 한 주장은 요약하자면 다음과 같은 식이었다. "일본은 애초에 충분히 근대화되어 있지 않다. 그것은 지금까지 결점이라고 간주되어왔지만, 세계사의 단계가 포스트모던으로 이행하고 있는 현재에는 오히려 이점으로 바뀌고 있다. 충분히 근대화되어 있지 않은 이 나라는 거꾸로 가장 쉽게 포스트모던화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예를들면 일본에서는 근대적인 인간관이 충분히 침투하지 않았기 때문에 거꾸로 포스트모던적인 주체의 붕괴에도 저항감 없이 적응할 수 있다. 그와 같이 21세기의 일본은 높은 과학기술과 난숙한 소비사회를 향수하는 최첨단의 국가로 변모해 갈 것이다." 이것은 바꾸어 말하면 당시의 일본 사회가 앞에서 이야기한 것과 같은 미국으로의 굴절을 표면적으로는 잊을 수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미국을 이긴 지금 미국주의의 일본 침투는 이미 생각하지 않아도 좋으며, 오히려 일본주의의 미국침투를 생각해야 한다는 풍조가 포스트모더니즘의 사상적 유행을 뒷받침하고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오타쿠계 문화와 일본의 관계는 집단심리적으로 크게 두 방향으로 갈라져왔다고 할 수 있다. 오타쿠계 문화의 존재는 한편으로 패전의 경험과 연결되어 있으며, 우리의 주체성의 취약함을 여지없이 보여주는 끔찍한 것이다. 왜냐하면 오타쿠들이 만들어낸 일본적인 표현이나 주제는 실은 모두 미국산 재료로 만들어진 이차적이고 기형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존재는 다른 한편으로 80년대의 내셔널리즘과 연결되어 세계의 최첨단에 선 일본이라는 환상을 가져다주는 페티시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오타쿠들이 만들어낸 의사 일본적인 독특한 상상력은 미국산 재료로 출발해 지금은 그 영향을 의식하지 않아도 되는 독립된 문화로까지 성장했기 때문이다. 오타쿠계 문화에 대한 과도한 적의와 과도한 상찬은 둘 다 여기에서 비롯된 것인데, 결국 양자의 근저에 있는 것은 우리의 문화가 패전 후 미국화와 소비사회화의 물결에 의해 뿌리째 변해버렸다는 것에 대한 강렬한 불안감이다. 지금까지의 논의에서도 분명해진 바와 같이 오타쿠계 문화에 대한 검토는 이 나라에서는 결코 단순한 서브컬처의 기술에 그치지 않는다. 거기에는 실은 일본의 전후처리, 미국의 문화적 침략, 근대화와 포스트모던화가 가져온 왜곡이라는 문제가 모두 들어 있다. 따라서 그것은 또한 정치와 이데올로기의 문제와도 깊이 관련되어 있다. 예를 들면 냉전 붕괴 후 지금까지 일본의 우익적 언설은 일반적으로 서브컬처화하고 가짜화하고 오타쿠화함으로써 살아남아왔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서브컬처의 역사를 이해하지 않고 주장만을 쫓아서는 그들이 지지를 받아온 이유는 결코 파악할 수 없다.


덧글

  • 수시렁이 2012/04/25 23:48 # 답글

    간만에 읽는 글이네요. <파우스트> 1호에 실린 글이었죠.
  • 착선 2012/04/26 10:29 #

    검색해보니 일본잡지인데 한국에도 발매되고 있는 것이네요. 저도 서점에 가면 한번 봐봐야겠습니다.
  • draco21 2012/04/26 00:43 # 답글

    아.. 안돼!!!!! 이런 깊이 있는 내용을 맛만 보여주심

    책을 살 수 밖에 없잖아!!! 너도!!!! 나도!!!!!!! ξ(✿❛‿❛)ξ▄︻┻┳═一 TOT
  • 착선 2012/04/26 10:30 #

    제가 바로 방랑하는 외판원
  • 링고 2012/04/26 08:36 # 답글

    글귀를 읽어보니 일본의 정치적인 내막에 대한 언급을 최대한 회피해 가면서 오타쿠 문화가 전반적으로 일본을 마치 이끈 것인양 묘사하고 있는 것 같네요.
    글쓴이의 시각이 조금 편협하고 위험해 보입니다. 미국과 일본의 문화 교류는 지금도 활발한데 여기서는 전혀 그렇지 않는 양 표현하고 있는 것도 그렇구요.
  • 치이링 2012/04/26 09:20 #

    저 책 발매당시 그 부분 때문에 오타쿠들에게 비판받았죠
  • 착선 2012/04/26 10:09 #

    확실히 정치적인 부분은 거의 언급하지 않고 있습니다. 기껏해야 메이지유신이나 한번 언급한 정도네요. 뭐 저자가 시작부터 서문에 사회학자도 저널리스트도 아니라고 단언하고 있기 때문에 약간 아쉬운 부분이 있죠. 곧 그 다음 권이 번역되서 나온다 하니 어떻게 바뀌었을지 기대해 봐야 겠습니다.
  • 치이링 2012/04/26 14:48 # 답글

    좋은 책이긴 한데,

    문제는 포스트 모던에 맞추기 위해 비약이 좀 보이고, 그 비약에 의거해 아즈마 히로키씨의 예측이 현재 시점에서 벗어난 부분이 있다는게 좀 걸리는 책이죠

    이 책을 토대로 조금 더 담론 형성이나 관련 비평서적이 나와도 좋을텐데,

    동물화한 세계에선 그 갈망의 소비가 그 무엇보다 우선되다 보니 비평이 그 책의 시점에서 멈춰버렸죠

    속편 원서로 일본에 있을때 읽었는데, 속편의 겨우는 일종의 보충이랑, 각 유행 매체에 있어서의 동물화하는 포스트모던의 모습을 그린 보충서같은 느낌이라 좀 아쉬운 감이 있었습니다
  • 착선 2012/04/26 23:56 #

    음 그렇군요. 속편인 '게임적 리얼리즘의 탄생'이 살짝 업그레이드 판이라면 좀 아쉬운데요.. 그래도 한번 사보고싶긴 한데, 그 돈이면 또 다른 매력적인 책을 살 기회가 있다보니..

    언제나 돈이 문제죠
  • 수시렁이 2012/04/27 04:08 # 답글

    절판요 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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