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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단괴롭힘, 왕따는 왜 발생하는가?《이지메의 구조》 by 착선

최근에 인천 계양구 A고등학교 B양이 동급생들에게 1년 넘게 왕따를 당하다가 목을 매 자살하려 했던 사건이 뉴스에 올라왔습니다. 이런 학교 내 집단괴롭힘과 학교폭력으로 인한 자살 사건은 언제, 어디서나 존재하고 있습니다. 이는 큰 사회적 문제이기 때문에 각계각층에서 집단괴롭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왜 집단괴롭힘 사건은 없어지지 않고 계속 발생하는 것일까요? 저자는 이러한 '왜 집단괴롭힘이 발생하는가?'에 대한 답변을 구조적 관점에서 접근하고 있습니다. 필립 짐바르도는《루시퍼 이펙트》에서 이라크의 아부그라이브 교도소에서 있었던 고문사건의 원인으로 싱싱한 사과도 썩게 만드는 썩은 사과상자의 영향력을 언급했는데, 이와 마찬가지로 집단괴롭힘 문제의 저변에는 썩은 사과상자, 학교라는 제도의 구조적 문제가 있다는 것입니다.

혹자는 왕따 사건을 교권의 붕괴나 학급질서의 붕괴로 인식하곤 합니다. 하지만 집단괴롭힘 사건이 자주 발생하는, 이 학교라는 공간은 매우 독특합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시민사회의 질서의 핵심은 보편주의와 휴머니즘이 결합된 형태입니다. 그에 반해 학교의 질서는 보편주의가 사라진 인간주의만이 존재합니다. 친구관계가 양호한 경우에는 배려를 베풀지만, 나쁜 관계에는 잔혹하고 박정하게 대합니다. 이러한 모습은 시민사회의 질서를 질서의 기준으로 보는 관점에서 보면 학교는 질서가 해체된 공간이며, 유아적이고, 욕구불만에 대한 내성이 결여된 것으로 보입니다. 하지만 아이들의 소사회를 조금만 주의 깊게 들여다보면, 독재체제나 전체주의 국가 이상으로, 생활 곳곳에 침투하여 영혼까지 노예화하는 음산한 질서가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인식하고 있는 선악의 개념과 학교 무리 안에서의 옳고 그름 사이에는 엄청난 괴리가 있는 것입니다. 이라크의 아부그라이브 사건을 평가한 슐레진저 보고서의 표현을 빌리자면, 집단괴롭힘 사건은 단지 비정상적인 개인의 악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정상적인 사회적 과정에서 비롯된 측면이 있는 것입니다.

누구든 자신의 의지에 반하는 상태에 있을 때 그곳이 바로 그의 감옥이다. - 에픽테토스 

우리는 보통, 우선 개인이 있고 그 개인과 개인이 유대를 쌓으면서 관계를 맺어간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학교공동체에서는, 우선 모두의 관계가 일차적이고 개인은 그 이차적 항목으로서 존재합니다. 학교는 운명처럼 밀착되어 지내야 하는 생활환경이기 때문에, 학생들은 개인으로 존재할 수 없으며 자기의 신분으로서의 자신을 살아갑니다. 이러한 상황에서의 윤리질서를 한마디로 말하면 고분고분하게 사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때문에 시민사회의 논리로 학교의 집단괴롭힘 문화를 이해할 수 없는 것처럼, 학교의 윤리질서에서 살아가는 학생들은 집단괴롭힘에 대한 외부의 논리를 이해하지 못합니다. 규범의 준거점이 다른 수준에 있는 것입니다.

현행 학교제도의 바탕에는, 시민사회의 질서가 쇠퇴하고 독특한 학교적인 질서가 만연해 있습니다. 이런 학교적인 질서 속에서 학생들도 교사들도 학교적인 현실감각을 몸에 붙이고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집단괴롭힘은 사람을 바꿔버리는 유해환경으로서의 '학교다운 학교'와 그 속에 만연하는 학교적인 질서를 뚜렷이 보여주고 있습니다. 가해학생들은 자신들이 학교적인 공간 안에 있다고 느끼는 한 자기들 나름의 학교적인 집단의 생활방식을 당당하게 일관합니다. 그들이 집단괴롭힘을 그만두는 것은 시민사회의 논리에 둘러싸여 더 이상 학교적인 생존방식이 통용되지 않음을 실감했을 때입니다.

이 윤리질서에 따르면, '옳음'이란 '모두'의 규칙에 부합된다고 느껴지는 것이다. 이지메는 그때그때 '모두'의 기분이 동해서 생겨난 '옳은' 행위이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 여기'에 연결되어 있는 한 그런 행위는 계속해서 더 많이 해야 한다. 설령 누군가를 죽음으로 몰아넣었다 해도 자신들 나름의 질서에 따랐을 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많은 이들이 동조한다는 것은 '옳다'는 뜻이다. 눈치가 빠른 것은 '옳은' 것이다. 분위기를 잘 맞추는 것도 '옳은' 짓이다. 그 중심에 있는 강자는 '옳은' 행동을 한다. 따라서 그 강자에게 복종하는 것은 '옳은' 행동이다. - p.40 

집단괴롭힘은 많은 경우 폭력의 형태를 띕니다. 폭력을 행사하는 가해자는 자신의 불완전감을 회피하기 위해 타인을 조종함으로서 얻어지는 전능감을 얻고자 합니다. 완전하게 조종하는 가해자 자신은 완전하게 조종당하는 타인의 반응에 자신의 존립 여부를 내맡기고 있는 극도의 상호의존적인 관계를 보여줍니다. 가해자는 이러한 집단괴롭힘에서의 전능모형을 구현하지 못하면 전능감을 내세워 속여오던 자신의 결핍, 불완전감이 드러나고 말기 때문에 괴롭힘을 멈추지 않습니다. 거기에서 이지메 가해자에게서 자주 볼 수 있는 독특한 피해의식과 증오, 잔혹성이 생겨납니다. 피해자가 자신의 행위를 거부하면 대부분 가해자 쪽이 그런 취급을 받은 것에 특유의 분노를 느낍니다. 집단괴롭힘 사건이 발생했을때 오히려 가해자와 그 가족이 큰소리를 치며 화를 내는 적반하장의 태도를 보이는 것입니다.

'내 눈은 피해자의 눈, 내 손은 가해자의 손'이란 말처럼 직접적이건 간접적이건 집단괴롭힘을 당하거나 묵인한 학생들은 때론 가해자가 되기도 합니다. 이러한 태도를 멜라니 클라인은 투사적 동일시라는 개념으로 묘사했는데, 집단괴롭힘을 견뎌낸 학생들은 자신을 강인한 이미지로 개조하는 일에 집착하며, 자신이 괴롭히는 피해자에게 자신을 투사합니다. 이렇게 자란 학생들은 처세하며 사는 사회에서는 강인해질 수 없는 자를 장난감처럼 취급하는 것을 정당하다고 생각하며, 집단괴롭힘을 견뎌낸 체험이 강할수록 이 권리의식도 강해집니다. 이들이 주장하는 강인함의 미학은 괴롭힘을 당하는 자는 한심하다든지, 괴롭힘을 당하면 스스로 단련하여 괴롭히는 자가 되면 된다는 생각을 초래합니다. 결국 이러한 현상은 학교가 전체주의적인 교육을 하지 않더라도, 학교라는 시스템의 존재만으로도 하위자를 권위자에게 순응하게 만드는 훈육기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렇다면 이런 집단괴롭힘 문제를 어떻게 해결해야 하는지에 대해 저자는 두 가지의 관점에서 접근하고 있습니다. 먼저 학교라는 곳은 성스러운 공동체로 인식되어 시민사회의 논리와 단절된 특수한 사회로 유지되는 것이 문제라는 것입니다. 시민사회의 논리를 학교에 적용하지 않는 것이 심각한 사건을 빈발시키고 있으며, 폭력을 쓰면 경찰을 부르는 것이 당연한 장소라면 일정한 선을 넘기면 경찰을 부르겠다는 한마디로 폭력형 집단괴롭힘을 멈출 수 있다는 것입니다. 제도나 정책이 바뀌면 이러한 생활환경의 이해 구조는 쉽게 변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실제로 데버러 L. 로드는 우리 마음속에 굳어버렸다고 가정하는 편견조차도 사실은 법에 의해 얼마든지 영향을 받을 수 있으며 변화될 수 있다고 지적한 바 있습니다.

또 다른 하나는 현대 학교의 구조의 개선입니다. 저자는 현대의 학교는 심리학의 감각차단 실험과도 같은 견디기 어려운 곳이 될 수 있다고 말합니다. 학교는 학생 생활 전반에 개입하고 있습니다. 전인교육의 공동체를 지향하고, 그것을 개개인에게 강제합니다. 집단 학습, 집단 섭식, 학급활동, 잡무 할당, 학교 행사 등을 강압함으로서 모든 생활 활동이 집단화됩니다. 같이 있고 싶지 않은 친구나 선생님과 종일 부대끼며 공동생활을 해야만 한다는 조건에, 다양한 강제적 학교 행사가 더해집니다. 게다가 폭력에 대하여 법의 손길이 미치지 않는 무법지대이기도 합니다. 시민사회에선 개인이 타인과의 거리감을 유지할 수 있는 기회가 있기 때문에 이런 정신적 중압감을 해소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학교가 폐쇄적이지 않고 인간관계를 선택할 수 있는 자유도를 높이면 공간안에서 친구를 따돌리고 괴롭히는 일은 줄어들 것이라고 말합니다. 즉 학급제도를 폐지하고 대학교처럼 과목을 자율화하는것이 바람직하며, 사회는 학교 외의 공부 방식을 제시할 수도 있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학생들은 감정노동자라기보다 감정노예라고 할 수 있다. 늘 미소를 지어야 하는 감정노동자인 승무원보다 억지로 끌려간 성노예에 가깝다. 학교에 강제 연행되어 우연히 같은 반에 배속되었을 뿐인 타인들과 친밀한 친구로서 공동생활을 강요당하는 강제노동은, 병사와 관계를 가져야만 하는 성노예의 강제노동과 동일한 형태다. - p.170 

저자는 학교에서 발생하는 집단괴롭힘의 구조를 풀어가면서 그 이상의 질문을 독자들에게 던집니다. 규칙을, 질서를 지키기 위해 인간의 존엄을, 때로는 생명마저도 경시하는 태도는 과연 학교만의 문화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학교에서 극단적인 형태로 나타나는 집단괴롭힘은 다른 곳에서도 충분히 나타날 수 있고, 나타나고 있습니다. 군대문화도 그 일종이며, 사회적으로도 소수자들에 대한 박해, 최근에 논란이 되고 있는 동성애자 문제에서도 이런 구조는 발현될 수 있습니다. 왜 학생들은 집단괴롭힘을 하는가에 대한 질문은 더 나아가 인간은 왜 소수의 사람들을, 약자를 괴롭히는 괴물이 되는지에 대한 질문으로 확장됩니다. 이러한 전체주의에 대한 매커니즘을 이해함으로서 열린 사회, 자유로운 사회로 나아가고자 하는 것이 저자의, 독자의 바램입니다.


덧글

  • 2013/04/24 14:32 # 답글 비공개

    비공개 덧글입니다.
  • 2013/04/29 13:26 # 비공개

    비공개 답글입니다.
  • 구름군단 2013/04/24 23:16 # 삭제 답글

    참... 아름다운 추억으로 가득해야 할 학창시절이... 왕따와 폭력으로 물드는게 참 안타깝고... 무섭네요~
  • 착선 2013/04/29 13:28 #

    제가 자각하지 못한 것일수도 있지만, 제가 고등학교 다닐땐 반에 왕따같은게 없었다고 느꼈습니다. 당시엔 당연한 거라고 생각했는데, 지금 와서 생각하면 참 축복받은 환경이였죠.
  • 노아필 2013/04/24 23:36 # 답글

    참 아이러니 한 것이, 강제성을 띠는 교육을 하면 당연히 이런 문제들이 불거질 수 밖에 없고,
    그렇다고 해서 조금은 자율성있는 교육을 실시하려고 하면 학생들의 태도가 개판이 되기 뻔하죠.
    저도 아직 나이가 많지 않아 비교적 최근의 중/고등학교를 졸업한 세대인데,
    만약 강제성이 없는 교육이 이루어진다면
    아마 우리나라 학생들의 학업능력은 어느정도 포기를 해야 함이 맞다고 생각합니다.
    '학습에의 자발적 의욕이 전혀 없는' 게 현대의 대부분의 학생들이니까요.


    또 왕따문제가 생각보다 어른들 입장에서 연구하고 고찰하지 못하는
    정말 사소한 문제로 일어나는 것도 안타깝습니다.
    대부분의 전문서적이나 뉴스에서는 실상은 알지 못한 채
    심각하다, 고쳐야한다 하는 겉핥기만 하고 있을 뿐이죠.
    학생들 간에 일어나는 왕따는 육체적 폭력말고도
    심리적인 압박이 상당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정작 자살, 폭행 등 물리적으로 사건이 일어나야 잠깐 주목하고 말 뿐이니...
    학교에서 실행하는 왕따 상담, 선생님과의 면담도 절대로 근본 대책이 될 수 없음을
    인지하지 못하는 것도 아쉽고요.
    정말 학교에도 이제 어느정도 가혹한 형사처벌이 필요하다고 봅니다.
    조금 강경하고 단순무식한 사고라고 생각이 되긴 하지만,
    근본적으로 차단해버릴 방법은 저는 이것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 착선 2013/04/29 13:29 #

    사실 직접적인 형태의 왕따보다는 흔히 은따라고 하는..그런 부분에 더 심각하고 잔혹하죠.
  • vivid 2014/04/04 12:44 # 삭제

    노아필님 의견에 완전공감 ...
    학교에서 일하고 있는데요
    문득 학교의 순기능과 역기능에 대해 생각하게 되면서
    학교가 왜 있어야하지?라는 원초적의문에 답답함을 느끼며 사이트를 뒤지던 중
    학교폭력은 왜 발생하는가라는 글에 끌려 들어왔네요.

    어렵네요 참.
  • 초록불 2013/04/25 11:41 # 답글

    한번 읽어봐야겠네요. 흥미롭습니다.
  • 착선 2013/04/29 13:26 #

    사실 구매전엔 크게 기대하지 않고 산 책이였는데, 예상외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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