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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력 속의 폭력을 말하다,《폭력이란 무엇인가》 by 착선

폭력이란 무엇인가? 이러한 질문을 들으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무의식적으로 살인, 강간, 싸움과 같은 물리적 폭력을 폭력의 이미지로 떠올리게 됩니다. 이런 폭력이 우리 주변에서 가장 쉽게 찾아볼 수 있고, 느낄 수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폭력은 이렇게 눈에 보이는 것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이 책의 저자 슬라보예 지젝은 눈에 보이는 주관적 폭력보다는 눈에 보이지 않는 객관적 폭력, 즉 상징적 폭력과 구조적 폭력을 지목하며 이에 관심을 두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지젝이 눈에 보이는 주관적 폭력에 관심을 두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보통 사람들이 혐오하는 주관적 폭력을 유발하는 것이 다름아닌 구조적 폭력이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지배적인 담론을 차지하는 관용적 자유주의자들이 가진 주된 관심사는 직접적이고 물리적인 폭력과 이데올로기적 폭력에 이르기까지 모든 형태의 폭력을 반대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접근방식은 주관적 폭력에만 초점이 맞추어져 있습니다. 오늘날 폭력과의 투쟁은 범죄와의 투쟁이며, 동시에 각종 차별에 대한 투쟁입니다. 하지만 다른 형태의 폭력은 시야에서 사라져버렸을 뿐더러 그런 형태의 폭력을 생각하는 것을 방해하고 있습니다. 구조적 폭력은 우리의 경제체계와 정치체계가 정상적으로 작동할 때 나타나는 폭력입니다. 일반적이라고 부르는 폭력, 주관적 폭력이 정상적이고 평온한 상태를 혼란시키는 것으로 보인다면, 객관적인 폭력은 이 정상적인 상태에 내재하는 폭력입니다. 이것은 눈에 보이지 않지만, 폭력을 이해하려면 반드시 고려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일반적이라고, 정상적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지젝은 바로 자본주의, 더 나아가서 민주주의를 말하는 것입니다.

선물투기와 같은 주식시장의 형태에서 정점에 달하는 자본의 폭력은 악한 의도가 없으며, 순수하게 객관적이고, 체계적이며, 익명성이 있습니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지젝은 자본주의 체제가 지금까지 등장한 어떤 사회, 이데올로기적 폭력보다 훨씬 더 섬뜩하다고 말합니다. 헤겔의 표현을 빌리면 객관의 과잉은 주관의 과잉에 의해 보완된다고 했습니다. 이를 증명이라도 하듯이 자본주의는 초객관적 폭력을 행사하며 대량실업 등 있으나 마나 한 사람들을 자동적으로 만들어내며, 다른 한편에선 민족주의적이고 인종주의적인 근본주의자들이 초주관적 폭력을 행사합니다. 이런 객관적 폭력을 생산하는 자본주의 체제에 반대한다는 것은 경제적인 분야의 반자본주의 뿐만 아니라 자본주의의 정치적 형식, 자유주의적 의회 민주주의의 문제를 다룰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문제는 오늘날 사상의 자유는 지배적인 위치에 있는 자유민주주의라는 합의를 거스를 수 없다는데 있습니다.

차라리 아이히만이 괴물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면 편했을 것이다. 아이히만의 경우 곤란한 점은 바로 그와 비슷한 사람들이 많다는 사실이다. 도착적이지도 않고 사디스트도 아니면서 과거에도 현재에도 끔찍하게 정상적인 사람들이 많다는 사실이다. 우리 관습과 윤리적 관점에서 볼 때 그 정상성은 온갖 잔인함을 한데 모아놓은 것보다 훨씬 더 끔찍하다. - 《악의 쾌락, 변태에 대하여》p.156 

현대사회가 가지고 있는 다윈주의적 태도는 일견 모든 비판을 허용하고, 모든 자유를 발산할 수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 그 자유엔 어떤 금지가 기입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현대사회의 기반이 되는 자유민주주의에 대한 합의만 유지된다면 어떠한 비판도 허용되며, 때론 장려된다는 사실입니다. 때문에 오늘날 진정한 위협은 수동성이 아니라 유사행동이며, 능동적이고 참여적이 되려는 이 충동은 실제로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고 있다는 사실을 은폐합니다. 객관적 폭력에 대한 자유주의적 좌파 담론에 만연하는 가짜 급박감에는 근본적으로 반 이론주의적 강렬함이 있는데, 이는 지금 당장 행동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어떤 상황에서는 즉각 참여하고자 하는 충동에 저항하는 것, 끈기 있고 비판적인 분석을 사용하여 일단 기다리면서 두고 보는것이 유일하면서도 진정으로 실제적인 일일 때도 있습니다.

지젝은 객관적 폭력에 대한 변혁은 근본적으로 사람들의 오래된 꿈을 실현할 뿐만 아니라 그것을 꿈꾸는 방식 자체를 다시 창안할 수 있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실질적 개선을 원한다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정치개혁이 아니라 무정치적 사회적 생산관계에서의 변화인 것입니다. 급진적 변화는 법률적 권리영역의 외부에서 일어나야 하는데, 그와 같은 민주적 절차에 대해서는 제 아무리 급진적으로 반자본주의적인 입장을 가졌다고 하더라도, 그 해법은 민주주의 매커니즘을 따를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잊어서는 안 되는 것은 민주주의 매커니즘은 자본주의적 재생산이 작동할 수 있도록 보장해주는 부르주아 국가의 국가기구의 일부라는 점이며, 이런 의미에서 오늘날 궁극적인 적의 이름이 자본주의, 제국, 착취 혹은 이와 유사한 어떤 것이 아니라 민주주의일수도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민주주의의 매커니즘을 모든 변화를 이루는 데 궁극적 프레임으로 받아들인다는것은 민주주의의 환상이고, 바로 이 환상이 자본주의적 관계의 근본적 변화를 가로막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지젝은 우리가 곧 사회주의냐 공산주의냐를 양자택일할 것이라고 말하며, 세계자본주의 체제가 내속적인 장기적 적대를 넘어 존속하면서 동시에 공산주의적 해결을 피하는 방법은 모종의 사회주의를 재발명하는 것 뿐이라고 지적합니다. 이를 위해선 프롤레타리아 투쟁, 혹은 폭력이 나타나야 한다고 말합니다. 이러한 형태는 엄격한 의미에서 지배계급과 지배계급의 국가에 저항하는 모든 폭력은 궁극적으로 방어적입니다. 억압받는 사람들에게, 폭력은 언제나 합법적인데, 왜냐하면 이들이 가진 지위가 이들이 폭력에 노출된 결과이기 때문입니다. 지젝은 이러한 이념에 실천적 긴박감을 부여하는 적대를 현실 안에서 찾아내는 것이 중요하며, 생태적 문제, 빈곤문제 등 현재 세계자본주의 체제의 문제들을 방치할 경우 인류가 파멸해 봉착할 수 있다는 자각을 가져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선 가시적인 형태로 보이는 폭력에 집중할 것이 아니라, 오늘날 우리가 해야 되는 일은 무엇이 이 폭력을 초래하는지 공부하고 또 공부하는 일인 것입니다.


덧글

  • 2013/04/29 14:33 # 답글 비공개

    비공개 덧글입니다.
  • 2013/04/30 22:24 # 삭제 답글 비공개

    비공개 덧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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