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여성 혐오는 남녀에게 있어서 비대칭적으로 작용합니다. 남성에게 있어서 여성 혐오는 여성 멸시를 뜻합니다. 세지윅은 호모소셜, 동성사회성의 관점으로 남성을 해석하는데, 남성이 사회에서 하나의 남성이 될 수 있는, 인정받을 수 있는 방법은 동성인 다른 남성의 '너는 남자답다'는 인정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때문에 남자들이 두려워하는 것은 '너는 여자같다'는 것입니다. 삽입 당하는 것, 소유 당하는 것, 성적 객체가 되는 것. 다른 말로 표현하면 여성화되는 것은 남자가 남자가 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하며, 남자들의 세계에서 여성화될수 있다는 공포는 동성애 혐오, 호모포비아로 이어집니다. 자기 여자를 소유하는 것이 성적 주체가 되기 위한 조건인데, 성적 주체로서 남성 집단이 가진 동질성을 유지하기 위해선 호모포비아는 필수불가결하며, 남자는 자신의 성적 주체성을 확인하기 위해 이용하는 장치가 바로 여성을 성적 객체화하는 것입니다. 여성을 객체화할때 남성이 여성을 이해하는것은 에드워드 사이드가《오리엔탈리즘》에서 지적한 구조와 비슷합니다. 사이드는 오리엔탈리즘이란 동양이란 무엇인가에 관한 서양인의 망상이라 지적했는데, 이처럼 남성은 여성을 객체화할때 여성을 여성으로서 바라보지 않고, 남성들이 원하는 여성이 여성이라고 생각합니다. 이처럼 서로를 남성으로 인정한 이들의 연대는, 남성이 되지 못한 이들과 여성을 배제하고 차별화함으로써 성립합니다.
폭력에 의한 지배도, 권력에 의한 지배도, 경제력에 의한 지배도 아닌 성에 의한 지배. 게다가 지배를 받는 쪽의 자발적인 복종을 이끌어내는 지배. 즉 공포에 의한 지배가 아니라 쾌락에 의한 지배야말로 궁극적 지배라 할 수 있을 것이다. 포르노그래피의 정석에는 이러한 '쾌락에 의한 지배'가 들어가 있다. 그 이유는 포르노그래피가 포르노 소비자인 남성에게서 모든 사회적인 속성을 제거한 뒤 다시금 남성성을 회복시키는 의식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남근은 쾌락의 원천으로 부동의 위치를 차지한다. - p.130
이런 남성들이 가진 여성 혐오의 아킬레스건은 '어머니'의 존재입니다. 여성을 멸시함으로서 남성이 될 수 있었지만, 자신을 낳은 여성을 멸시할 수는 없습니다. 그런 이중적인 심리가 '마리아-창녀 콤플렉스'로 발현되며, 성녀와 창녀라는 성의 이중 기준으로 여성의 성을 구분짓습니다. 성의 이중 기준은 여성을 두 집단으로 분할시키는데, 남성에게 있어서 여성은 아내 혹은 어머니 아니면 매춘부, 결혼 상대 아니면 놀이 상대가 되는 것입니다. 남성이 정한 사회적인 성의 이중 구조로 인해 아내는 생식용 여성으로 구분되어 쾌락을 빼앗긴 채 생식의 영역으로 소외되고 쾌락용 여성은 생식에서 소외됩니다. 성의 이중 기준은 남성에게 있어 기묘한 상황을 만들어내는데, 특정 여성에 대해 진심일 경우엔 성의 대상으로 보아서는 안 되며, 성의 대상으로 볼 경우 진심으로 대해서는 안 되는 자가당착적 모습을 보이기도 합니다.
여성의 객체화, 타자화를 여성 혐오라고 했는데, 이런 여성 혐오는 여성에게서도 나타납니다. 저자는 어떤 의미에서 여성이라는 사실을 혐오하는 감정은 모든 근대 산업사회를 살아가는 여성의 보편적인 감정이라고도 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여성 혐오는 여성에게는 자기 혐오로 발현되는데, 사회적으로 여자의 가치는 여성에게 있정받는 가치와 남성에게 인정받는 가치 두 가지가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어머니는 딸에게 '아들로서 성공하라'와 '딸로서 성공하라'를 동시에 보냅니다. 사회적 성공이라는, 아들로서 성공한 딸은 집안일에 소홀하다느니 여성스럽지 않다느니와 같은 비난을 받기 쉬우며, 딸로서 성공하는 것은 남자에게 시집가서 지배당하는 삶을 의미합니다. 즉 여성은 '명예남성'이냐 '노예'냐의 길을 강요당하는데, 사회적 약자는 그 종류를 막론하고 모두 비슷한 범주 폭력을 받고 있습니다. 범주는 지배적인 집단에 의해 만들어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존재하는 언어 세계 속에 뒤늦게 태어난다. 언어는 자신의 것이 아니며 타자에게 속해 있다. '여성'이라는 범주는 나 이전에 존재하며 '너는 여자다'라고 타자에 의해 지명된다. 그리고 '그래, 나는 여자야'하고 스스로가 스스로를 정의했을 때 여성은 태어난다. 그리고 그 범주를 받아들일 때에는 그 범주가 역사적으로 짊어진 모든 하중을 동시에 떠안지 않으면 안 된다. 그것 이외에 '자유'로운 선택은 없다. - p.157
사회적 통념으로 인해 우리들은 습관처럼 남성은 능동의 성, 여성은 수동의 성이라 부릅니다. 하지만 이러한 구도는 자연적인 것이 아닙니다. 푸코 또한《성의 역사》에서 섹슈얼리티는 자연적인 것도 본능적인 것도 아니고 문화와 역사의 산물이라 지적한 바 있습니다. 사회적인 환경이 갖춰진다면 여성은 능동적으로 변합니다. 여학교에 딸을 보내는 많은 부모들은 딸이 '여성스럽게' 자라주길 바라고 있을 것이지만, 연구 결과는 남녀 공학 출신 여학생이 이성애적 젠더 아이덴티티를 보다 일찍 발달시키는 것에 비해 여학교 학생에게는 반대로 리더십을 발휘할 기회가 더 많이 부여되기 때문에 더 '남성스러운' 모습을 보인다고 말합니다. 대니얼 버그너 역시《욕망하는 여자》에서 통념과 다르게 여성은 남성만큼 또는 그 이상 성욕이 강하며, 문화와 훈육 때문에 욕망을 알아차리지 못하거나 혹은 강압당하고 있을 뿐이라고 지적합니다. 저자는 사회에 내재된, 젠더 관계의 핵심인 여성 혐오를 지적함으로써 이성애 질서, 동성애 혐오, 젠더 비대칭성, 여성 차별 등과 같은 문제를 해결해나갈 것을 주장합니다.
덧글
유명 여성 연예인들이 출연한 토크쇼에서
바람피는 사위는 용서할 수 있어도, 바람피는 며느리는 용서할 수 없다더군요.
어쩌면 어릴 적부터 학습된 결과가 아닐까 싶더군요.
하지만 사실, 저도 여자를 별로 좋아하지 않습니다(...) 여자 비율이 조금 높은 학과에 몇년 구르다 보니 성별을 넘어 인간으로서도 용납 안 될 잔인한 모습들을 자주 봐 와서...개인적으로 이것과 배척되는 논지의 책자를 읽어보고 싶어지는군요.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예를들면 어떤 사람이 상냥한 여성을 원하는데, 세상에는 안그런 여성이 많잖아요?
그래서 자기뜻대로 되어주지않는 여성을 원망하고 미워하게 되는것 같더라고요
개인적으로는 그 이유가
남성에게 있어서 여성은 자기가 아닌 남이라는 생각이 뿌리내리고 있어서가 아닐까 싶었어요
속으로 자기하고 떼어놓고 생각하니까
어떻게 되어달라고, 자기가 원하는 모습을 그렇게 쉽게 요구를 해댈 수 있는거라고 생각해요